1장. 어둠의 심연 속으로 Out of the Gallows, Into the Darkness
1장. 어둠의 심연 속으로 Out of the Gallows, Into the Darkness
악몽. 또 그 악몽이었다. 또다시 자신을 산 채로 갉아먹으며 엄습해오는 공포에 유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한숨을 쉬었다. 연인이었던 미르가 스승인 진율과 동료들을 죽인 후 몇 년째 반복되는 악몽이었다. 악몽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베개는 눈물로 범벅이 된 데다 옷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유리는 불안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부여잡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4년. 스승님과 동료들이 미르에게 죽은 지 벌써 4년이 지났다. 그리고 그 일로 미르가 황궁에 끌려가 참수를 당한 지도 4년이 지났다. 길다면 긴 시간이건만, 여전히 과거의 기억은 자신을 끈질기게 괴롭히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유리는 마시다 반쯤 남은 술병을 집어 들었다. 어디를 가나 고통스러운 기억이 떠오르면 유리는 제일 먼저 술을 찾았다. 술과 그녀는 뗄 수 없는 깊은 관계가 된 지 오래였다.
입천장부터 목구멍까지 타오를 듯한 독한 술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술을 끝까지 한 번에 들이켠 유리는 세 모금 정도 남은 술을 입안에 모두 털어 넣었다. 이제 취기가 올라와야 했다. 취해야만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부랑자처럼 지낸 4년 사이 주량이 꽤 늘어난 탓에 정신은 멀쩡하기만 했다. 취기는커녕 오히려 공허함만 맴돌 뿐이었다.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부서져버린 공허한 마음에 술을 가득 채워 넣는다 한들 소용없다는 사실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유리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맨발바닥에 거친 나무 판자로 만들어진 바닥의 촉감이 느껴졌다. 몇십 년의 세월을 버텨온 낡은 탁상 위의 촛불이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고, 작은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만이 비좁고 어두운 방 안을 밝혔다. 유리는 빈 술병을 내려놓고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뺨을 스치며 멀리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얇은 커튼이 춤추듯 펄럭였다. 검푸른빛 밤하늘에 달이 환하게 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른 저녁인 듯했다.
바깥에는 분주하게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보통의 주행성 인간이나 엘프들에게 밤이란 하루의 끝이었지만, 야행성인 밤의 인간들에게 밤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유리는 처연한 표정으로 창틀에 기댄 채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옷차림과 손에 들고 있는 물건들로 판단하건대 손님으로 보이는 몇 사람이 손가락에 담뱃대를 걸친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여관의 하인들은 바쁘게 상자를 나르며 바닥을 쓸었다.
그들의 얼굴에서 활기가 느껴졌다. 하루하루 이런저런 일에 치여 살아가면서도, 사람들에게는 어떻게든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고달픈 삶 속에서 뭐가 그리도 즐거운 걸까? 사람들의 얼굴 위로 피어나는 환한 미소를 본 유리는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우울한 마음을 꾹 눌러 삼켰다. 마지막으로 웃어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미르를 만난 이후로, 스승님과 동생들이 죽은 뒤로 몇 번이나 목숨을 내던지고 싶었는지 셀 수도 없었다.
술에 취해 제국을 떠도는 방랑자가 된 지 벌써 4년째였다. 그저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 위해 검을 들고 일거리를 찾아 돌아다닐 뿐이었다. 이 모습을 진율이 보았다면 주술사답지 못하다고 호통을 쳤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죽은 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한다고 해도, 신을 모시지 않는데 어떻게 주술사라고 부를 수가 있을까. 지금 내 꼴에는 차라리 칼잡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지. 내가 죽으면 묻어줄 사람이나 있으려나. 자신의 처량한 신세에 유리는 헛웃음이 났다.
언제까지 자신을 갉아먹는 공포 속에서 지내야 할지 두려웠다. 이렇게 고통에 몸부림치며 계속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오랫동안 갈망해왔던 죽음의 심연 속으로 몸을 내던지고 싶었다. 그 생각에 유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오늘이야말로 결정을 내리리라. 오늘이야말로 자신을 오랫동안 괴롭혀온 기억들로부터 해방되리라. 유리는 모든 것을 끝낼 각오를 했다. 죽음. 오직 그것만이 자신을 삶의 고통에서 해방시킬 수 있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간단히 짐을 챙겨 여관을 나온 유리는 광장 남쪽의 주술사 공동묘지로 향했다. 죽기 전 꼭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너무나도 보고 싶지만 볼 수 없는 사람. 미르에게 살해당한 자신의 스승, 진율이었다.
오랜만에 방문한 묘지는 늘 그렇듯 음울했다. 사람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오늘 누군가를 추모하러 온 사람은 자신밖에 없는 듯했다. 유리는 땅속 깊이 묻힌 수많은 망자들을 지나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은 스승님의 묘 앞에 섰다. 묘비에는 그의 이름 ‘진율’이 새겨져 있었고, 앞에는 이미 누군가가 왔다간 듯 검은 국화 네 송이가 놓여 있었다. 유리는 그 꽃들이 선우와 동생들이 놓고 간 것임을 알았다. 진율의 무덤에 찾아올 사람들은 그의 살아남은 제자들밖에 없었으니까.
유리는 그 옆에 자신이 가져온 검은 국화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주저앉아 멍하니 묘비와 손목의 검은 염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둠의 신이 정말 존재하기는 할지, 그가 제국을 지배하는 밤의 인간들의 창조자일지 의문이 들었다. 이미 마음에서 신앙심이 사라진 지는 오래였다. 어둠의 신이니, 신의 말씀이니 하는 것 따위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도대체 왜 스승님께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가엾은 고아들을 불쌍히 여겨 직접 거두시고, 늘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던 스승님인데 어찌 신께서는 스승님이 비참하게 돌아가시도록 놔두신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진율이 이토록 끔찍한 죽음을 맞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는 욕심 없는 선한 삶을 추구하던 주술사였고, 신을 모시는 이로서 절대 자신의 임무를 게을리한 적도 없었다.
어쩌면 진짜 탓해야 하는 것은 어둠의 신이 아니라 자신일지도 몰랐다. 아, 스승님의 말씀을 진작에 들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유리는 진율이 경고했던 미르의 광기를 무시했던 것을 후회했다. 어떻게든 미르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생각만 해도 가증스러운 그의 심장에 칼을 꽂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미르는 이미 오래 전에 황제의 명령으로 참수를 당해 저 세상 사람이 되었고, 설령 그가 살아있었더라도 복수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유리는 자신이 얼마나 겁쟁이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울고 또 얼마나 울었을까, 주변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유리는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다른 망자의 묘 앞에 자신처럼 검은 망토를 걸친 한 어떤 남자가 서 있었다. 그도 누군가를 추모하러 온 듯 검은 국화 한 송이를 묘비 앞에 놓았다. 유리는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기도하는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얼굴은 깊이 눌러쓴 망토 두건 때문에 보이지 않았지만, 유리는 어쩐지 그에게서 자신과 같은 슬픔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묘지 뒤쪽의 절벽으로 향했다. 환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달이 회색 구름과 함께 밤하늘에 떠 있었다. 귀뚜라미와 올빼미가 우는 소리가 이따금씩 귓가를 찔렀고, 두 뺨에 말라붙은 눈물 위로 다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절벽 끝에 다다르자 발밑으로 아찔하게 느껴지는 높이에 유리는 머뭇거렸다. 온통 나무와 풀숲으로 우거진 절벽 아래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여기서 떨어져도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유리는 길게 숨을 내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여기까지 와서 망설이다니! 유리는 자신을 다그쳤다. 절대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끝내야 했다. 이번에야말로 모든 고통을 끝내야 했다.
눈을 감고 다시 한 번 깊게 심호흡을 한 후, 유리는 허공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몸이 절벽 아래로 기울어지며 떨어졌다. 이제 모든 것이 끝이었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지옥과도 같은 세상과의 이별이었다. 곧 죽음의 세계에서 스승님과 동생들을 만나게 될 터였다. 그 생각에 홀가분해진 기분 탓인지, 아래로 추락하고 있음에도 몸은 하늘을 향해 붕 떠오르는 느낌이 났다. 유리는 자신이 진정으로 죽음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죽음이라기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번개처럼 찌릿하는 기운이 온몸의 혈관을 타고 느껴졌는데,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전혀 낯선 강렬한 기운이었다. 유리는 눈을 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예상치 못한 광경에 당황했다. 자신은 아래로 추락하지 않았다. 대신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처럼 거꾸로 몸이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유리는 바둥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두건을 깊이 눌러쓴 어떤 남자를 보았다. 그 남자는 한 손의 마력으로 추락하기 일보 직전인 유리를 붙잡고 있었다. 남자가 손을 가슴팍으로 끌어오듯 당기는 시늉을 하자, 유리는 그의 손짓대로 남자에게 끌려갔다.
빌어먹을, 마법사잖아! 자신을 괴롭히던 악몽 속의 황금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순식간에 남자의 코앞까지 끌려온 유리는 마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쳤다. 하지만 말 그대로 발버둥치는 것일 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몸은 여전히 공중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