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Prologue
공포.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그 감정은 모두의 마음 속에 살아 숨쉰다. 공포를 다스리는 방법이나 그에 대한 생각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공포에 굴복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하고, 다른 누군가는 공포를 무릅쓰고 용기 있게 맞서 싸운다. 또 다른 누군가는 공포란 그저 형체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마도 원초적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고통스러운 기억에 관한 이야기라면 옳은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유리에게 공포란 형체 없는 허상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공포란 실재하는 끔찍한 악몽이었다. 그 공포는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고, 만질 수도 있고, 심지어는 자신을 바라보기도 하고 말을 할 수도 있었다. 이 공포의 존재는 사람들이 흔히 두려워하는 교활하고 사악한 요괴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건 바로 과거, 유리가 사랑했던 연인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 누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살인마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살인마 연인을 만났을 당시 유리는 주술사였다. 그녀가 속한 종족인 밤의 인간들은 그 이름처럼 야행성인 인간들이었는데, 세상의 유일무이한 어둠의 존재였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추운 땅이라 불리는 창백한 대륙 전체를 지배하는 블러드크라운 제국의 주인이었다.
밤의 인간들은 자신들의 창조신인 어둠의 신을 섬겼다. 그들 중 주술사의 지위를 가진 이들은 신을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에서 늘 기도를 올리고, 죽은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일을 했다. 유리도 주술사로서 신을 모시는 일을 오랫동안 해왔다. 하지만 본래 그녀의 신분은 주술사가 아니었다. 그저 하찮고 별 볼 일 없는 천민일 뿐이었다.
유리가 주술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스승인 진율 덕분이었다. 제국 중심부에 위치한 수도 반월성에는 ‘반월당’이라는 사당이 있었다. 이곳에서 진율은 신을 모시면서 버림받은 고아들을 데려와 보살폈다. 그 또한 어릴 적 거리를 떠돌던 고아 출신으로, 진율은 갈 곳 없는 아이들에게 먼저 다가가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다. 그렇게 한두 명씩 데려온 아이들은 10년 사이 어느 새 열 명으로 늘어나 모두 그의 제자가 되었다.
유리는 진율이 가장 마지막으로 데려온 아이였다. 유리가 반월당에 왔을 당시엔 열 일곱 살로, 제자로 받아주기에 나이가 조금 많은 편이었다. 게다가 먹여 살려야 할 제자가 이미 아홉이나 있었기에 진율은 다른 아이들을 더 데려올 여유가 없었다. 연민의 이유로 배고픈 입을 더 거둬들였다간 모두가 굶주릴 수도 있었다. 때문에 아이를 맡아달라는 사람들의 부탁에도 그는 정중히 거절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그가 유리를 데려오게 된 이유가 있었다. 귀한 약초를 구하러 서쪽으로 가던 어느 날, 진율은 매화나무가 가득한 어떤 시골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분홍빛 꽃잎이 흩날리는 절경에 감탄하던 그는 마을 한복판에서 한 소녀가 돌팔매질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보통 같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가 마주한 끔찍한 광경은 너무나도 참혹했다. 사람들은 소녀의 얼굴과 배에 발길질을 하고 돌을 던져대면서 더러운 년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소녀의 몸은 온통 피멍과 상처로 가득했다.
무자비한 발길질 속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욕설과 대화, ‘살려달라’고 처절하게 외치는 소녀의 가녀린 목소리로 짐작컨대 소녀가 큰 죄를 저지른 것은 아닌 듯했다. 소녀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어떤 오해가 있는 듯싶었다.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정말 잘못했어요……. 소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더 이상 말할 기운도 없어 보였고, 연이은 발길질에 걷어차여 살갗이 다 뜯겨져 나간 터라 흙바닥이 피로 난무했다.
그 모습을 보자 진율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다가가 무슨 연유로 그렇게 하느냐고, 소녀가 대체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외지인이 어디서 남의 일에 참견질을 하냐며 씩씩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들은 분풀이가 끝나자 다친 소녀를 그대로 버려 두고 떠났다. 얼마나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한 것인지 소녀는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진율은 급한 대로 소녀를 부축해 가까운 여관으로 데려갔다. 가깝다고는 해도 외진 시골 마을이라 말을 타고도 두어 시간은 더 가야 하는 거리였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진율은 곧 죽을 것처럼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소녀를 차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는 침대에 소녀를 눕히고 상처에 약초를 발라주며 또 어디가 아프지는 않은지, 상처가 곪지는 않았을지 지켜보며 열심히 돌봐주었다.
며칠을 정성으로 보살핀 덕일까, 다행히도 소녀는 정신을 차렸다. 진율은 오래 집을 비웠으니 부모님께서 걱정하시겠다며 매화마을에 데려다 주겠다고 말했다. 안 돼요, 돌아가면 또 맞을 거예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집에는 가기 싫어요. 소녀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흐느껴 울었다.
굳이 많은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소녀와 그 부모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강 알 수 있었다. 진율은 소녀에게 마음 편히 있을 곳이 없다면 자신을 따라 사당으로 오지 않겠냐고 물었다. 소녀는 그의 손을 잡고 망설임 없이 따라 나섰다.
그렇게 진율은 유리를 자신의 열 번째이자 마지막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의 아홉 제자들은 새로 온 식구를 환영하며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그러나 유리는 그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겉돌기만 했다. 처음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의 친절이 낯설고 무서워 겁을 먹은 것이었다. 부모와 마을 사람들에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두들겨 맞았던 기억, 늘 자신에게 망나니의 딸이라고 손가락질하던 사람들……. 유리는 언제나 혼자였기에 그 흔한 친구조차 사귀어 본 적 없었다.
진율은 유리가 사당 생활에 익숙해질 때까지 천천히 여유를 두면서 먼저 글을 읽고 쓰는 법부터 가르쳐 주었다. 유리는 자신보다 열 살은 어린 사당의 아이들도 아는 글을 모른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글을 모르니 자신의 이름도 쓸 줄 몰랐고, 책을 읽는 것은 더더욱 꿈도 꿀 수 없었다. 괜찮아,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단다. 누구나 다 처음이 있는 법이잖니? 넌 영특한 아이니 충분히 잘해낼 수 있단다. 그럼 먼저 네 이름을 쓰는 법부터 가르쳐주도록 하마. 진율은 축 처진 유리의 어깨를 다독였다.
불안에 갇혀 우울해하던 유리는 진율의 말에 조금씩 용기를 냈다. 유리는 그의 가르침을 따라 정신없이 글공부에 전념했고, 손과 입이 닳도록 쓰고 읽는 법을 익혔다. 그녀의 부모와 달리 진율은 절대 사소한 실수나 모자란 지식을 꾸짖는 법이 없었다. 그저 제자가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글을 읽고 쓸 수 있을 때까지 헌신과 사랑으로 감싸줄 뿐이었다.
처음으로 그의 도움 없이 자신의 이름을 써낸 날, 유리는 신이 나서 진율에게 달려가 종이를 펼쳤다. 스승님, 이제 무리 없이 책도 읽을 수 있어요. 보잘것없는 저를 사당으로 데려와 살게 해주시고 글을 가르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편지를 읽어본 진율의 주름진 입가에 선명한 미소가 피어났다. 서투른 필체로 쓴 편지였으나 그 안에 담긴 제자의 진심만큼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글공부에 익숙해졌을 때쯤 유리는 낯선 사당 생활에도 잘 적응해가고 있었다. 사당에서 유일한 그녀의 또래인 사내아이 선우의 도움으로 다른 아이들과도 친해졌고, 더 이상 사람들의 친절과 호의에도 겁먹지 않았다. 동생들은 많아야 열 살 정도의 어린 꼬마들이어서 챙겨주어야 할 것이 많았다. 가끔 짓궂은 장난을 치고 말썽을 피우는 탓에 피곤해지기도 했지만 유리의 얼굴에서는 늘 웃음꽃이 피었다. 그녀에겐 새로운 것을 배우고 처음으로 사귄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너무나도 즐겁기만 했다. 진율은 눈에 띄게 밝아진 유리의 모습에 안도하며 보람을 느꼈다.
진율은 유리에게 글공부 이외에도 중요한 한 가지를 더 가르쳐주고자 했다. 바로 무기를 다루는 법이었다. 유리는 그의 가르침을 따라 여러 가지를 배웠는데 예상 외로 검술에 재능을 보였다.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진율은 주술사가 되는 시험을 치러보겠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세상에서 스스로 헤쳐 나가는 지혜를 터득시키기 위함이었다.
사실 그의 모든 제자들이 주술사가 된 것은 아니었다. 제자들 중 셋은 주술에 별 관심이 없었고, 두 명은 수련 과정을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포기했다.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주술사가 되는 과정은 훨씬 고되고 혹독했다. 오랜 시간 인내와 끈기 아래 행해야 하는 수련과 공부는 뛰어난 재능과 잠재력만으로는 쉽게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주술을 부려 바람의 방향을 바꾼다거나, 눈 깜짝할 새에 검을 휘둘러 요괴를 해치우는 것이 아니었다. 요괴 퇴치 따위는 일의 일부였다.
주술사들의 주된 임무는 어둠의 신을 모시고 죽은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이는 하루도 빠짐없이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썩어가는 시체의 끔찍한 모습과 악취를 자주 마주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주술사들이 아무리 신을 모시는 일을 한다고 존경을 받을지라도, 자진해서 주술사가 되고 싶어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허나 고된 수련 과정에도 불구하고 진율의 제자들은 운 좋게도 다섯 명이나 시험을 통과했다. 그 다섯 명 중 한 명이 바로 유리였다. 정식으로 주술사가 된 이후에도 유리는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실력을 갈고 닦은 끝에 일취월장하여, 마침내 검술에 있어서는 진율의 제자들 중 최고가 될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때때로 유리는 진율과 동료들을 따라 마을이나 길가에 나타난 요괴를 퇴치하러 사냥을 나갔다. 그런 후 사당으로 돌아오면 늘 그렇듯 어둠의 신께 기도를 올리고 향을 피웠다. 가끔은 동생들과 검술 시합을 하거나 함께 부적을 만들기도 했고, 명절이면 다 같이 마루에 둘러앉아 송편을 빚기도 했다.
비슷한 나날이 반복되는 주술사로서의 생활은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유리에게는 이런 생활이 더할 나위 없이 특별하고 소중했다. 사당에 오지 않았다면 절대로 알지 못했을 평온한 삶이었다. 유리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자신을 도와준 스승에게 늘 감사했다. 그녀에게 진율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진정한 아버지나 다름없었다. 유리는 평화로운 나날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어둠의 신께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그토록 바랐던 평화로운 삶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어떤 청년 때문이었다. 진율의 심부름으로 광장에 나온 유리는 ‘미르’라는 남자를 만났다. 미르는 진귀한 용의 눈이라 불리는 흔치 않은 황금색 눈동자에 온화한 인상을 가진 잘생긴 청년이었다.
유리가 손목에 찬 검은 염주를 보고 주술사인 것을 눈치챈 미르는, 이 근방에서 못 보던 아가씨라며 어느 사당에서 왔냐고 말을 걸었다. 유리는 낯선 이가 걸어오는 질문에 입을 꾹 다문 채 모른 척했다. 아무리 새로운 삶에 적응했다고 한들 사당 밖의 낯선 사람들은 여전히 불편하고 어색했다. 유리는 자꾸만 끈질기게 이름을 묻는 청년에게, 당신과는 할 이야기가 없다고 차갑게 대꾸하며 뒤돌아섰다.
허나 미르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이상한 집착은 유리가 반월당으로 돌아간 후에도 계속되었다. 미르는 며칠에 걸쳐 유리에게 선물과 편지를 보냈다. 유리는 그 선물들을 돌려보냈고, 자신을 만나달라는 편지에도 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미르는 반월당으로 직접 찾아왔다. 유리는 정중하게 말을 돌려 거절할 생각으로 그를 사당 밖으로 데려갔다. 숲을 함께 거닐며 미르와 이야기를 나누던 유리는 문득 그가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두들겨 맞던 비참한 어린 시절, 친구 하나 없이 외롭고 고독하던 나날들, 늘 자신에게 손가락질하던 사람들. 유리는 처음으로 자신의 고통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
뜻밖의 공통점을 발견한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졌다. 유리는 더 이상 미르의 방문이나 편지를 거절하지 않았고, 그와 사당 근처에서 자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천천히 마음을 열고 있을 때쯤, 미르는 유리에게 고백할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아한 손짓으로 보랏빛 안개를 피워냈다. 마력 안개였다. 그제서야 유리는 미르가 평범한 청년이 아닌 ‘마법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피워낸 흐릿한 형상의 보랏빛 안개는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두 사람을 감쌌다. 말로만 들어왔던 난생처음 보는 아름답고 몽환적인 마법에 유리는 마음을 빼앗겼다. 미르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의 연인이 되어달라고 말했다.
미르가 마법사였다니! 유리는 마법사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마법사들은 모두 귀족이었다. 고대 흡혈귀 시대에는 절대다수가 강력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세대가 지나며 점차 알 수 없는 이유로 마력을 잃게 된 밤의 인간들은 이제 극히 일부만이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제국에서 마력을 가졌다는 것은 곧 마법사라는 뜻이며, 마법사라는 것은 곧 귀족이라는 뜻이었다.
여태껏 들리는 얘기로만 막연하게 상상했던 귀족들의 모습과 달리 미르는 예의 바르고 정중했다. 오만방자하거나 무례하기는커녕 태어날 때부터 몸에 친절이 배어 있는 사람 같았다. 다정하고 상냥한 성격, 부드러운 목소리, 진귀한 용의 눈이라고 불리는 보기 드문 황금색 눈, 또한 그런 눈동자 색과 잘 어울리는 ‘용’이라는 뜻의 이름과 매혹적이고 수려한 외모까지, 미르는 무엇 하나 완벽하지 않은 점이 없었다. 마치 여우에게 홀린 것처럼 그에게 빠져든 유리는 망설임 없이 고백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청년에 대한 생각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었다. 진율은 미르를 좋게 보지 않았다. 주술사들은 원래 마법사들과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주술사들은 마력으로 자연의 힘을 비틀어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마법사들의 방식이 섭리에 어긋난다고 여겼고, 마법사들은 그런 주술사들을 고리타분하다고 여겼다.
진율이 미르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마법사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법사와 어울리는 것도, 연인을 두는 것도 모두 주술사의 교리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평생을 살면서 그렇게나 눈빛에 살기가 있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유리는 미르가 한없이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라고 믿었지만, 진율의 눈에 미르는 어떤 꿍꿍이를 숨기는 위선자, 먹잇감을 사냥하는 맹수에 더 가까웠다.
진율은 잘생긴 외모 뒤에 숨겨진 광기를 보지 못하는 자신의 제자를 걱정했다. 그는 유리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일렀다. 내일부터는 더 이상 그 미르라는 청년과 어울리지 말거라. 그 사람을 곁에 두면 너만 위험해질 거야. 그러나 이미 사랑에 빠져 미르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린 유리는 말을 듣지 않았다. 눈빛만으로 사람의 선하고 악함을 판단하다니, 그녀에게는 스승의 이야기가 터무니없게 들렸다. 유리는 진율이 미르가 마음에 들지 않아 괜한 억지를 부리는 것 같았다.
결국 유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스승에게 대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유리는 달이 뜨자마자 미르를 따라 반월당을 떠났다. 그녀는 진율이 틀렸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자신이 선택한 이 청년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후회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얼마 가지 않아 유리는 그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진율의 말이 옳았음을 깨닫게 된 것은 미르의 옷에서 핏자국을 발견한 어느 날부터였다. 미르와 함께 반월성을 떠나 제국 동부 지방을 여행하고 있던 유리는 가끔 그의 옷이나 머리카락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피 냄새가 나는 날은 미르가 재미 삼아 요괴나 짐승을 사냥하고 온 날이었다. 하지만 주술사로서 오랫동안 요괴를 퇴치하고, 시체를 여럿 본 경험이 있는 유리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직감이었다. 그의 옷깃에 묻은 핏자국은 평범해 보였지만, 어쩐지 요괴의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며칠 후, 미르는 잠시 볼 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웠다. 유리는 서둘러 채비를 하고 여관을 나섰다. 아무래도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미르가 충분히 시야에 들어올 만큼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미행하기 시작했다. 혹여 들키는 일이 없도록 발소리를 죽인 채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뒤에서 따라갔다.
마침내 근처의 숲에 다다랐을 때 어떤 여자가 저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만나기로 미리 약속했던 듯 서로를 보자마자 와락 껴안더니 숲속으로 함께 들어갔다. 나를 속이다니! 유리는 배신감에 치가 떨렸지만 소리를 지르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유리는 요괴를 사냥할 때처럼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그들을 따라갔다.
이윽고 미르와 여자는 작은 연못 앞에서 멈춰 섰다. 미르가 뭐라고 말하자 여자는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었다. 달빛 아래 연못가에서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은 꼭 연인 같았다. 미르가 여자에게 다시 뭐라고 말하는 모습이 보였다. 유리는 숨을 죽이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여자의 얼굴이 갑자기 공포로 일그러졌다. 무슨 말을 한 것인지,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으로 손을 벌벌 떨면서 뒷걸음질쳤다. 미르는 그런 여자의 모습을 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 앞으로 손을 들어올려 그녀의 목을 쥐는 시늉을 했다. 보랏빛 마력 안개가 여자를 감쌌고, 가냘픈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여자는 제발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미르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가 주먹을 쥔 손을 펼치자 여자의 몸이 힘없이 땅에 떨어졌다. 앞으로 고꾸라진 그녀는 미동조차 없었다.
유리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미르가 사람을 죽인 것이었다. 미르는 여자가 죽은 것을 확인하고 수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정확하게 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놀랄 틈도 없이 유리는 미르의 마력에 끌려갔다. 미르는 언짢은 표정으로 자신을 미행한 연인을 내려다보았다. 온화하고 자상하기만 하던 청년은 그동안 숨겨왔던 비밀을 들키자 본색을 드러냈다. 그 황금색 눈동자에는 진율이 말했던 광기가 있었다. 유리는 그제서야 사람의 눈빛을 보라는 진율의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깨달았다. 그러나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미르는 유리를 어딘지 모를 폐허 안의 깜깜한 지하실에 가두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그녀를 마법으로 고문했다. 가끔은 사람들을 데려와 죽이는 모습을 유리가 지켜보도록 하기도 했고, 갑자기 다정하게 웃으며 음식을 떠먹여 주기도 했다. 미르는 그런 모든 자신의 행동들을 사랑이라고 했다.
유리는 그가 증오스러웠다. 살인마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빠져나올 방도가 없었다. 검이나 주술 따위로는 자연의 힘을 마음대로 비틀어 쓸 수 있는 마법을 절대로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도망칠 계획을 세운 유리는 반항을 멈추고 순종적으로 미르의 말을 따랐다. 미르는 이제서야 유리가 자신의 사랑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그녀를 감시하지 않았다. 유리는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단도를 한 자루 훔쳐 숨겨두었다. 그리고 조용히 기회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머지 않아 그 기회가 다가왔다. 미르는 그날도 살인을 끝내고 침대에 누워 마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세상을 지배하는 강력한 자들이었지만, 그들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바로 마력이 바닥나는 것이었다. 마력은 강력하나 무한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제아무리 막강한 힘을 가진 마법사라도, 마력이 바닥나면 힘을 재충전하는 휴식이 반드시 필요했다.
유리는 미르가 방심하는 틈을 노렸다. 그리고 기회가 다가왔을 때, 망설임 없이 칼끝을 그의 왼쪽 눈에 찔러 넣었다. 잠결에 공격을 당한 미르는 피 흐르는 왼쪽 눈을 감싸쥐고 비명을 질렀다. 그는 유리에게 당장 이리로 오지 않으면 죽여버릴 거라며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유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유리는 고문당하고 굶주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나 반월당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한발 늦어 있었다. 거대한 불길에 휩싸인 사당의 사랑채와 별채들은 한 줌의 재로 변했고, 앞마당에는 잔인하게 토막이 난 동생들의 몸뚱어리가 굴러다녔다. 스승님도 마찬가지였다. 진율은 몸이 마력으로 갈기갈기 사방으로 찢겨 그나마 멀쩡한 얼굴을 제외하고서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의 주술사 제자들은 죽은 스승의 시체를 부여잡고 목놓아 오열했다. 그들의 얼굴도 온통 피와 상처투성이였다. 모두 미르가 한 짓이었다.
미르는 뒤를 돌아 유리를 보고선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그는 태연하게 옷소매로 손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그리고 흉측해진 왼쪽 눈을 만지작거리며 가까이 다가와, 피를 닦던 손으로 유리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유리는 그 가증스러운 손길을 쳐냈다.
그녀는 이제 연인에서 원수가 되어버린 미르의 심장을 향해 칼끝을 겨누었다. 아버지 같은 스승과 소중한 동생들을 죽인 연인을 용서할 수 없었다. 유리는 미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불행히도 칼끝은 그의 심장에 닿지 못했다. 미르의 마력이 담긴 손짓 한 번에 천체검은 산산조각이 난 파편이 되어 시체들과 함께 땅 위에 나뒹굴었다. 가소롭다는 듯 웃던 미르는 한 손으로 유리의 목을 잡고 들어올렸다. 그는 땅을 적신 주술사들의 핏자국처럼 붉은 불꽃을 손안에서 피워내 연인의 뺨에 가져다 댔다. 살갗이 타들어가는 냄새와 하얀 연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유리는 고통에 울부짖으며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살인마는 멈추지 않았다.